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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지역별 간이역 탐방 시리즈] 전남 보성의 차밭 근처, 봉림역의 잊힌 시간

전라남도 보성군은 녹차 재배지로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푸른 차밭을 보기 위해 이 지역을 찾는다. 그러나 화려한 관광 명소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보성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바로 오랜 세월을 조용히 견뎌온 간이역, 봉림역이 그것이다. 이 역은 더 이상 정기적인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깃든 시간과 흔적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봉림역의 개요와 설립 배경

봉림역은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봉림리에 위치한 간이역으로, 보성차밭과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개통된 시점은 1960년대 후반으로, 당시 지역 농산물의 수송과 농촌 주민의 이동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특히 녹차 수확기에는 수레를 밀고 온 농민들이 역에 모여들어, 완성된 찻잎을 다른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거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봉림역은 보성선의 일부였으며, 하루에 몇 차례 여객열차와 화물열차가 정차하였다. 역사는 소규모 목조건물로, 단층 구조와 1면 1선의 플랫폼이 전부였다. 이 간소한 구성은 역의 본질적인 목적, 즉 농촌 교통의 보조적 기능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여느 시골 간이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철도원 한두 명이 상주했으며, 대부분의 업무는 수기로 처리되었다.

봉림역이 가장 붐비던 시절의 기억

봉림역이 가장 활기를 띠던 시기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였다. 이 시기에는 보성군 일대에서 생산된 녹차, 쌀, 채소류 등 농산물의 주요 운송 수단으로 철도가 활용되었으며, 봉림역은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보성의 녹차 산업이 점차 대외적인 인지도를 높여가던 무렵, 봄철 수확기에는 봉림역 플랫폼이 찻잎을 가득 실은 짐수레와 상인들로 붐볐다고 한다.

당시에는 하루 4~5회 정기 여객열차가 봉림역에 정차하였으며, 그중 일부는 서울이나 광주 방면으로 향하는 장거리 열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 앞에는 간이 매점과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열차가 도착할 즈음이면 역전 광장은 자연스럽게 시장처럼 변했다. 열차가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분주히 오르내렸고, 이웃 간의 안부 인사가 오가며 마을 전체가 일종의 사회적 공간처럼 기능하였다.

봉림역은 또한 명절이나 학교 개학 시즌마다 특히 혼잡했다. 당시 보성 읍내나 광주, 서울 등으로 진학하는 학생들과 도시로 일하러 떠나는 청년층이 이 역을 통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하루 전부터 역 앞에 줄을 서는 일도 흔했고, 출발 당일에는 부모들이 손수 만든 도시락을 건네며 배웅하는 장면이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봉림역은 단순한 교통 거점이 아니라, 마을과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는 관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역에서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보내고, 소식을 전했다. 봉림역이 살아 움직이던 그 시절은, 단지 기차가 다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삶의 이야기가 오가고 인간적인 교류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맞이한 쇠퇴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도로교통의 발달과 함께 봉림역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트럭 수송이 일반화되고, 개인 차량 보유가 증가하면서 기차를 통한 농산물 수송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열차 정차 횟수도 점차 감소하였고, 급기야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여객 열차가 사실상 정차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 봉림역은 무인역으로 전환되었으며, 역사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간헐적인 화물열차의 통과만 있을 뿐, 승하차를 위한 운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 건물은 외관상 유지되고 있으나, 그 내부는 비워진 지 오래이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추억으로만 회자되는 공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단순한 폐쇄된 구조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조용한 풍경 속에서 마주한 시간의 잔상

봉림역을 찾는 이는 많지 않지만, 그곳을 실제로 방문한 이들은 말한다. 차밭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드문드문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무성한 잡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녹슨 철로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고. 역사 옆의 오래된 벤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며, 일부 창문은 깨진 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특별한 고요함과 정서가 배어난다.

지역 주민 중에는 여전히 봉림역을 추억하는 이들이 있다. 과거 이 역에서 타지로 떠났던 청년, 혼례를 치르고 서울로 이사하던 신혼부부, 명절 때마다 역 앞에서 가족을 기다리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역이 단순한 교통 수단을 넘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봉림역을 통해 되짚어보는 지역 간이역의 가치

간이역은 흔히 효율성과 경제성의 논리에 밀려 사라지는 존재로 인식되지만, 지역 사회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봉림역 또한 그러한 공간 중 하나다. 비록 지금은 운행이 중단되었지만, 과거에는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마을 주민들의 정서적 중심이기도 했다.

지금의 봉림역은 관광지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지는 않다. 별도의 안내 표지나 편의 시설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만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이 역의 매력을 더욱 부각시킨다. 아무런 설명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정적과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봉림역이 우리에게 남긴 것

폐역이 된 역에는 종종 무관심과 방치의 흔적이 서려 있지만, 봉림역은 여전히 조용한 품격을 지닌 장소이다. 정비가 부족하여 외관이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과거 수십 년간의 마을 삶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이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역과의 연결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지금의 봉림역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타지 않는 플랫폼을 가진 장소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분명한 존재감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곳에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 현재 보성군은 지역 철도 자산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 개발 방안을 모색 중에 있으며, 봉림역 역시 그 일환으로 주목받고 있다. 역사가 문화 공간이나 전시관으로 재탄생하는 가능성도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우리가 잊은 줄 알았던 공간이, 다시금 의미를 가지는 순간은 결코 멀지 않다. 봉림역은 그 조용한 자리에서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지역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