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간이역은 단지 열차의 정차 여부만으로 그 존재 가치를 따질 수 없다. 산업화 시기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던 이 공간들은 이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특히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면서, 간이역은 대중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상징적 장소로 자리매김하였다.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그 아련한 풍경은 스토리와 결합하여 강한 인상을 남기며, 이후 실제 방문으로 이어지는 ‘성지순례형 관광’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다음은 영화나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 사용된 간이역 가운데, 대중적 인지도가 높고 문화적으로도 가치 있는 다섯 곳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경북 봉화군 양원역 – 드라마 도깨비 외 다수
백두대간 깊숙한 곳, 차로 접근이 불가능한 독특한 입지를 지닌 양원역은 대표적인 ‘무정차 간이역’이자, 화면 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장소이다. 철도 외에는 별다른 기반 시설이 없는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과 원형 그대로의 시골 정취가 어우러져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후 양원역은 사진 작가들과 영화 제작진이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철도 유휴 자산이 문화 자원으로 전환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1. 드라마 도깨비 (2016~2017)
양원역은 인기 드라마 도깨비에서 매우 인상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드라마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며, 각종 명장면과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배경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양원역은 주인공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억과 감정을 되새기는 장소로 설정되어, 고즈넉하고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극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무인 간이역의 소박한 플랫폼과 주변의 자연 환경이 어우러져, 도심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정서적 여백을 제공하였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양원역은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었고, 촬영지 방문을 희망하는 팬들이 늘어났다. 그 결과, 역 주변에 관련 안내판이 설치되고 사진 촬영 명소로 자리 잡았다.
2. 영화 소나기 (1995)
김유정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소나기 역시 양원역 인근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순수한 첫사랑의 아련함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은 서정적인 영화로, 시골 간이역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작품의 정서와 잘 어울렸다. 양원역의 낡은 역사와 주변 자연환경이 영화의 배경으로 활용되며, 관객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다큐멘터리 및 사진 프로젝트
양원역은 드라마나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사진 프로젝트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국 철도와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기록하고자 하는 작업에서 양원역은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선정된다. 특히 철도 문화와 지역 공동체의 변화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양원역의 정적이면서도 강한 존재감은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된다.
2. 전북 임실군 오수역 – 영화 편지 (1997)
1990년대 감성 멜로영화의 정수로 꼽히는 영화 편지는, 간이역의 낡고 정겨운 분위기를 극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애틋한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장소로 등장하는 오수역은, 실제로도 외관이 크게 변하지 않아 당시의 감정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비 내리는 오후, 한가로운 시골 간이역의 플랫폼이 배경이 되며, 주인공들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주요 장면이 촬영되었다. 이후 오수역은 방문객이 줄어들던 소외된 역에서, 영화 속 한 장면을 체험하고자 하는 여행자들로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3. 강원도 정선군 아우라지역 – 영화 라디오 스타 (2006)
한때 잊힌 가수의 부활을 다룬 영화 라디오 스타는 강원도의 폐광촌을 배경으로 진행되며, 그 중심 공간 중 하나가 아우라지역이다. 실제 영화 속에서 아우라지역은 주인공이 DJ로 일하게 되는 소도시로의 진입 지점이자,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상징적 장소로 설정된다. 간이역 특유의 소박한 외관과 주변의 산세가 어우러져, 도시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이 영화 이후 아우라지역은 '라디오 스타역'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지역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게 되었으며, 매년 영화 관련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4. 전남 곡성군 가정역 – 드라마 사랑비 (2012)
전라선 폐선 구간에 위치한 가정역은 한때 물류와 여객 수송을 담당하던 작은 간이역이었으나, 정차 열차가 사라지면서 조용한 유휴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사랑비에서 과거 회상의 장면 속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한 이 역은, 주변에 위치한 증기기관차 관광열차(S-Train)의 기착지로 활용되면서 방문객이 점차 증가하였다. 오늘날에는 철도 마니아뿐만 아니라 드라마 팬들에게도 특별한 장소로 인식되며, 인근 폐선 철로와 연계된 도보 코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5. 경남 합천군 황강역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018)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시대적 고증과 함께 세트 장소 선정에 있어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황강역은 주인공이 열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장면에서 등장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현재 정기 열차는 정차하지 않지만, 황강역은 당시의 철도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시대극의 무대로서 손색이 없었다. 주변에 위치한 합천영상테마파크와의 접근성도 좋아, 촬영지 순례를 위한 관광 동선으로 활용되며,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주었다.
촬영지를 넘어선 문화 자산으로서의 간이역
이처럼 영화와 드라마 속에 등장한 간이역들은 단지 배경을 제공하는 장소를 넘어, 극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분위기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이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남게 되면, 해당 간이역은 자연스레 ‘문화 자산’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실제로 많은 간이역이 철도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도 문화재 등록, 관광지화, 지역 축제 공간 등으로 전환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간이역은 더 이상 과거의 교통 수단이 머물던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감성과 기억, 영상과 서사, 그리고 지역 정체성이 결합된 복합적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영화와 드라마의 역할은 작지 않으며, 앞으로도 간이역은 다양한 이야기의 무대가 되어, 그 존재 가치를 넓혀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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